2006 이화인의 밤 - 4
본문내용 2006 이화인의 밤
윤형주의 CM song (펌)
밝고 경쾌한 멜로디로 한때 큰 사랑을 받았던 광고 속의 짧은 노래 . 70∼80년대 전성기를 달렸던 창작 CM(Commercial Message Song)송이 자취를 감추고 있다. 대신 요즘은 재 즈, 레게, 랩 등 외국 노래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창작 CM 송의 어제와 오늘을 알아본다.<편집자의 도움말>
◎첫 작품은 61년 방영된 ‘서울사이다’/줄줄이 사탕·브라보콘·투게더 등/70년대 들어 최고전성기 누려/컬러TV 등장으로 영상에 밀려/90년대 레게·랩 등 외국노래로 대신
「하늘에서 별을 따다 하늘에서 달을 따다 두 손에 담아드려요 아름 다운 날들이여 사랑스런 눈동자여 오오오오 오란씨」
젊음만이 가질 수 있는 아름다움을 눈동자로 표현한 유명한 CM송 이다. 이 노래는 오준영 작곡, 김도향 편곡. 감미로운 목소리의 주인공은 윤석화. 지금은 중견 배우가 되어 있지만 당시는 긴 생머리의 여대생이었다.
국내 광고에 CM송이 등장한 것은 60년대 초반이다. 첫 작품은 61년 아카데미 극장에서 방영된 「서울 사이다」였다. 이후 불과 5∼6년 사이에 라디오 CM송이 활성화된다. 이때 인기를 끈 작 품으로는 「진로소주」 「닭표간장」 「ABC화장품」 등이 있다. 특히 「진로소주」는 CM송이 처음으로 대중적 히트를 기록한 작품이다 .
70년대 CM송은 청바지 통기타와 더불어 청소년문화의 하나로 자리잡는다. TV보급이 늘어나면서 대중음악을 앞지르는 첨단 감각으로 무장한 CM송이 등장해 인기를 끌었다.
길옥윤 신중현 최창권 김용선 등 쟁쟁한 뮤지션들이 70년대 초반 광고음악을 이끌었다. 73년부터 새로운 인물들도 대거 등장했다. 이장희 김도향 김세환 윤형주 하춘화 정미조 윤석화 등이 그들. 작곡자로는 강근식 김도향 이장희와 조금 늦게 가세한 윤형주 송창식 등이 있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해도 CM송을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저 「재미삼아」 만드는 것에 불과했다. 75년 대중음악계를 강타한 대마초사건은 일단의 가수들이 CM송에 전념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TV에 나가 노래를 할 수 없게 되자 생활비를 마련하는 수단으로 광고노래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대마초 사건으로 CM송이 전성기를 맞은 것이다. 「아빠 오실 때 줄줄이」로 시작하는 「줄줄이사탕」은 김도향을 단숨에 스타로 만들 었다. 「주고 싶은 마음 먹고 싶은 마음」의 「빙그레 싸만코」(작 사·작곡·노래 이장희), 「열두시에 만나요 브라보콘」(작곡·노래 강근식), 「엄마 아빠도 함께 투게더」(작곡·노래 송창식) 등이 70년대를 대표하는 작품. 또 윤형주의 작품 「좋은 사람 만나면 나눠주고 싶어요」의 롯데껌 CM송은 지금도 대중음악 못지 않는 사랑을 받고 있다.
불과 10초 이내의 짧은 노래지만 CM송의 히트는 수십억원 이상 의 광고효과를 가져왔다. 때문에 기업들은 사람들의 가슴에 좀더 깊이 파고들 수 있는 노래를 원했다. 광고주의 요구에 맞추기 위해 CM송 제작사들은 외국으로 자체연수를 보내는 등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당시 서울오디오(대표 김도향)는 40여명의 직원을 가진 대형 CM송 프로덕션이었다. CM송 전문 작곡가와 가수를 전속으 로 거느리고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80년대 컬러 TV의 등장은 CM송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노래위주가 아닌 영상위주의 광고가 등장했기 때문이다. 외국의 유명한 CF를 들고와 『이대로 만들어 달라』는 광고주들의 요구도 많아졌다.
이때부터 창작 CM송은 「촌스럽다」는 이유로 평가절하되는 운명을 맞이했다. 그렇지만 80년대는 정수라 장필순 등 CM송 스타를 배출하면서 명맥이 이어졌다.
90년대는 대중음악의 세태변화와 더불어 CM송에도 새로운 단장을 요구했다. 우리말 노래보다는 외국의 댄스음악을 더 선호했다. 대중음악계도 레게, 랩, 테크노, 레이브 등 흑인 댄스음악이 물결을 이뤘다. 또 80년대 말부터 이용되기 시작한 컴퓨터그래픽도 CM 송의 설 자리를 잠식했다. 한국 CM송의 산실로 불렸던 서울오디오도 직원을 반으로 줄여야 했다.
90년대에 탄생한 기억에 남는 창작 CM송은 거의 없다. 이제 우리말로 된 창작 CM송은 장년층들에게 아련한 추억으로만 남아있을 뿐이다.<이상연 기자>
◎‘CM송 대부’ 김도향/사랑·평화의 메시지 담아/23년간 2,0 00여 작품 발표/‘현재의 불황 크게 걱정 안해’
통기타 붐이 막 움틀 무렵인 70년대 초. 당시 김도향(51)은 재즈가락과 타령조가 절묘하게 녹아든 노래 「벽오동」으로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그는 대중음악 가수보다 「한국 CM송의 대부」라는 호칭이 더 잘 어울린다. 첫 CM송은 줄줄이 사탕. 그냥 심심해 서 만들어 본 것이 「벽오동」보다 더 큰 인기를 얻었다. 73년 배동근이라는 어린이가 불렀던 이 노래는 음악평론가 이백천씨가 글을 쓰고 그가 곡을 달았다.
3년 뒤에는 아예 본격적으로 나섰다. CM송 제작에 뛰어든지 올 해로 23년째. 지금까지 2,000여곡을 만들었다. 자신이 직접 노래를 부른 것도 500여곡에 이른다. 줄줄이 사탕, 알사탕, 맛 동산 등이 그의 작품이다.
그는 80년대 중반까지 거의 매일 3곡정도의 CM송을 만들었다. 그는 짧은 노래지만 그속에 사랑과 평화의 메시지를 담으려 노력해 왔다고 자부한다. 그는 CM송업계가 불황을 겪던 80년대 중반 한동안 명상·태교 음악에 빠져 있었다. 동료들은 그의 잠정적 은퇴 를 두고 『어려운 상황에서 끝까지 CM송을 지키지 않고 혼자만 빠져나간다』는 불만을 털어놓기도 했다.
『음악을 하는 사람으로서 명상음악은 아주 매력적이었어요. 인간의 정신을 순화하고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음악을 만들고 싶었지요. 이제 이 작업은 거의 끝났습니다』
명상·태교 음악을 완성한 지난해부터 다시 CM송을 제작했다. 그는 현재의 불황에 대해서도 『한 사회의 문화적 흐름을 억지로 막을 수 없다』면서 『크게 걱정할 것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오 히려 미래에 더 큰 기대를 걸고 있다.
『우리나라 광고계도 곧 저작권 문제에 봉착하게 될 것입니다. 언제까지나 외국 광고 베끼기를 계속할 수는 없어요. 물론 우리의 광고제작 수준이 모방에서 창조의 단계로 끌어 올려진 것은 명백한 사 실입니다. 저작권 문제가 불거지면 순수 창작이 아니면 경쟁에서 살아남기 힘들죠. 더불어 창작 CM송도 활기를 얻게 될 것입니다』
CM송은 사실 광고의 부속물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요즘 청소년들은 대중음악에 물드는 것이 아니고 CM송에 물든다』고 주장한다. 광고에 등장하는 외국 노래들이 문화침투의 첨병역할을 한다는 것.
『실제로 CM송은 대중음악의 그 어떤 히트곡보다 가장 많이 방송됩니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청소년들을 중독시켜 나갑니다. 그것이 가져올 결과를 생각해 보세요』
작업을 다시 시작한 그는 CM송 업계의 가장 큰 어려움으로 제작 비를 꼽았다. 편당 협정가격은 4백50만원. 편당 1천만엔(한화 약 8천만원)인 일본과는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김도향은 『 좋은 CM송을 만들기 위해서는 제작비의 현실화가 급선무』라고 강조했다.<이상연 기자>
◎CM제작사 현황/전문제작사 10여곳 불과/서울오디오 ‘사관학교’ 역할
현재 CM송 제작사는 전국에 50여개쯤 있다. 그중 20여개가 서울에 몰려있다. 이 가운데 전문제작사로 부를 수 있는 곳은 10 여개 정도에 불과하다.
「서울오디오」와 「강프러덕션」(대표 강근식)은 1세대 CM송 제작사들. 김도향이 운영하는 서울오디오는 한때 전체물량의 70% 가 까이를 소화해냈다. 윤석화 정수라 등도 이 곳을 통해 CM송과 첫 인연을 맺었다. 서울오디오는 오랜 경력과 김도향의 유명세 덕분에 「CM송의 사관학교」로 불린다.
강근식은 김도향과 더불어 70년대 이름을 날렸던 CM송 가수겸 작곡가. 그의 대표작으로는 해태 브라보콘 등이 있다.
「CM라인」과 「블루캡」은 서울오디오에서 독립한 사람들이 만든 업체. 이 두곳은 최근들어 서열 1, 2위를 다투는 대형업체로 성장했다.
역시 서울오디오에서 독립, 91년 「뮤직뱅크」를 차린 전동석감독 (35)은 『광고물량은 시간이 흐를수록 늘어나지만 창작 CM송은 갈수록 줄어든다』면서도 『지금 세계의 광고흐름이 「자연으로의 회귀 」이기 때문에 다시 창작 CM송의 시대가 올 것』으로 내다봤다. 그는 「바람이고 싶어 강물이고 싶어」라는 의류광고의 CM송을 직접 불렀다.
이들 외에 성우 권희덕이 세운 「서울사운드디자인」과 「사운드 랩 」 등이 CM송 제작에 참여하고 있다.
◎얼굴없는 CM송 가수들/윤석화·정수라·장필순 등 대표적/현재 2 0여명 프리랜서로 활동
CM송 전문 가수들은 흔히 「얼굴없는 가수」로 불린다. 목소리만 들리고 얼굴은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CM송 전성기 시절에는 각 프로덕션에서 가수들을 데리고 있었다. 윤석화 정수라 장필순 등이 당시의 스타들. 윤석화는 600여곡을 부른 기록을 가지고 있다.
또 대부분의 가수들이 무명시절 CM송 제작에 참여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이승철도 한때는 CM송 가수였다.
CM송 가수들은 92년 「코러스협회」(회장 방대식)를 만들어 각자 프리랜서로 활동중이다. 현재 활동하는 회원은 약 20여명. 강미영 신해옥 김형로 오승원 방대식 등이 실력을 인정받는 CM송 전 문가수들이다.
급할때면 각 프로덕션의 음악감독이 직접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하루만에 글과 곡을 만들고 녹음까지도 해야하는 CM송 제작의 특성 때문이다.
이들 가수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편당 20만원정도의 개런티를 받는다. 하지만 인기기복이 심한 대중가수들과는 달리 결혼을 해도 계속해서 활동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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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새우깡 예찬(윤형주)-CMsong
디지털 딴지일보에서 퍼왔습니다.
- 塞友康(새우강) -
멀리에 있는 벗의 편안함을 바라며.....
遜理假寥 損耳佳 塞友强愛 飡罹價料
손이가요 손이가 새우강애 손이가요
(겸손을 다스려 거짓함을 자제하니 아름다운 것만 가려서 듣도다..
멀리에 있는 벗을 변함없이 사랑하니..값진것을 얻을때도 벗에게 주고 싶다.)
阿李遜 蘖慇遜 自求滿 孫利加
아이손 얼은손 자구만 손이가
(언덕에 오얏나무 변함 없으니 자신의 처지만을 한탄하지말고 스스로
만족함을 깨우쳐 후손에게 이로움을 주리오..
語對書娜 塞友康 焉災遯止 塞友康
어대서나 새우강 언재둔지 새우강
(물음과 답을 아름다운 글로 멀리있는 벗의 편안함을 바라니.....
비록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하나 어찌 그대에게 재앙이 오리오!?)
雨罹逗罹 櫛居要 農心塞友康
우리두리 즐거요 농심새우강
(비가와 근심이 머무른다 하여도 삶이란 다스림이 중요한것이니..
농부의 마음으로 멀리있는 벗의 편안함을 바라도다...)
윤형주의 노래비